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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동시대 풍경

제24회 서울올림픽이 1988년 9월 17일 16일간에 걸쳐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최됐다. 한국은 금메달 12, 은 10, 동 11개로 종합 4위를 차지했다. 1995년 해방 50돌을 맞아 서울 광화문 경축행사장을 비롯해 각종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총독부 건물 첨탑이 철거됐고, 전국 각 사찰과 교회에서는 일제히 종을 울려 감격의 그날을 되새겼다.
1990년대 선거 풍경을 보면,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정책 설명회와 공명선거를 위한 여러 행사들이 활발히 전개됐다.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등 여러 단체들이 공명선거 캠페인을 벌였다. 1995년 국회에서 선거구획정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95 공명선거 기획단 발대식’이 있었다. 1997년에는 참여연대에서 ‘100인 유권자위원회 출범 기자 설명회’를 열었다.
IMF 사태에 대해 한국민들은 거국적으로 금모으기 캠페인을 벌여 극복 의지를 보였다. 현대판 국채보상운동인 ‘금모아 나라살리기운동’은 외환보유액을 늘리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신용도를 높이는데도 일조한 것으로 평가됐다. 국민들이 장롱 속에 있던 것을 기꺼이 내놓으면서 동참해 모은 금은 20억 달러가 넘었으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2001년 8월 IMF 관리체제에서 완전히 졸업했다.
1990년대에는 국가 시설 및 사회인프라 시설이 확충됐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김포공항 새 청사, 광주와 대전지하철 등 각종 시설이 건설되었다. 국내 건설현장의 개발 열기도 뜨거웠다. 1990년대 초반 정부는 역점사업으로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했다. 전국적으로 택지개발사업, 재개발 붐이 일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와 고층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도시의 발달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촌은 취약해갔다. 생산비에 못 미치는 쌀값을 보장하는 집회 등이 잇따라 일어나는 등 그나마 어려운 농촌을 시위로 대변해주었다.
이 기간 기술 수준이 높은 공업제품의 수출량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반도체?전자제품?선박?자동차?컴퓨터?휴대전화 부문이 두드러졌으며, 벤처기업이 등장했다. 해외에 한국기업이 많이 건설됐다. 포르투갈의 삼성전자 TV공장 등 해외 진출기업이 늘었다. 이 기간에 동아건설이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고, 현대중공업이 인도 봄베이 해상에 플랫폼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가는 속에서 한국군의 해외파병도 이루어졌다. 한국군은 유엔평화유지활동에 적극 동참했다.
노동계는 총파업을 벌이고 정치세력화의 필요성도 자각했다. 1996년 말 노동법 개정에 대해 민주노총 지도부가 무기한 농성에 들어가고, 노동계가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곧바로 닥친 IMF 국가위기는 노동자에게 고통분담이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계는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에 자각하기 시작해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을 결성해 대선후보로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내세웠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위로부터의 개혁’이 펼쳐져, 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성원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과 시민단체들이 벌이는 밑으로부터의 사회정화운동이 조화를 이루게 되면, 밝고 깨끗한 도덕사회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순수 민간단체들이 벌이는 시민운동은 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확산돼나가는 개혁이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국민운동보다도 큰 전파력을 가질 수 있었다.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회, 과소비추방범국민운동본부 등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는 ‘새질서 새생활’ ‘거리질서 확립’ 등의 캠페인과 과소비 추방운동 등을 벌여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