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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6.10남북청년학생회담

1988년 3월 29일,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김중기 군은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남북의 청년학생들이 8월 1일부터 14일까지 각각 한라산과 백두산을 출발해 '국토종단순례대행진'을  벌인 뒤 판문점에서 만나 대동제를 갖고, 이산가족교류와 공동올림픽개최 등을 논의하며,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서울대나 김일성대학에서 민족대단결을 위한 청년학생 체육대회를 열고, 실무회담은 6월 10일 판문점 또는 제3국에서 갖자고 제의했다.
5월 14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은 '6.10남북청년학생 실무회담 성사 및 공동올림픽 개최를 위한 범시민학생결의대회'를 갖고 '남한의 백만청년학도가 북한의 청년학도에게 보내는 3차 공개서한'을 채택했다. 전국 60여 개 대학에서 1만7천여 명이 참석한 이날 집회에서 학생들은 '6.10회담'에서 88올림픽을 민족대화합의제전으로 치르는 문제 등 네가지 안건을 논의하고, 회담 일시는 6월민주항쟁 1주년 기념 6월 10일 오후 3시로 하자고 확인했다. 
'6.10남북청년학생회담' 개최에 대해 당국은 6월 9일 '6.10회담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총궐기대회'가 열리는 연세대학교를 원천봉쇄했다. 학생들은 정부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강행키로 하고, 9일 오전 서울, 경인, 호남, 영남, 강원 등 전대협 6개 지역별로 '6.10회담성사결의대회'를 가진뒤 오후 5시 연세대 대운동장에서 전국 25개 대학생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6.10회담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총궐기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대회가 끝난 뒤 정문돌파를 시도하다 경찰과 격렬한 충돌이 벌어졌다. 이날 학생들은 판문점 출정을 위해 철야농성을 벌였다. 
6월 10일, 학생들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 회담을 강행키로 결의, 전국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사태를 빚었다. 전대협 소속 전국 60여개 대학생 1만여 명과 민가협회원, 재야인사 1백여 명 등은 10일 오전 11시, 연세대 대운동장에서 <6.10민주화투쟁 1주기 기념식 및 백만학도 출정식>을 가졌다. 출정식을 마친 학생들은 낮 12시부터 정문과, 대운동장, 세브란스병원 등 3개 방향으로 분산, 경찰의 저지선을 뜷고 집결지인 서울역으로 행진하려 했으나 최루탄을 쏴대는 경찰저지에 밀렸다. 학생들은 수많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며 강경하게 저지하는 경찰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맞섰다. 2천여 명의 학생들은 한때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신촌로터리 부근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한편 고려대 대운동장에서 <6.10민주화투쟁 1주기 기념식 및 백만학도 출정식>을 가진 2천5백여 명의 대학생들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학교정문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자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연세대에 들어가지 못했던 학생 6천여 명은 오후 1시 40분경 서울역 광장에 집결, 열차편을 이용해 문산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경찰의 저지로 서울역 주변에서 1시간여 시위 끝에 해산됐고, 오후 4시경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네거리에서 판문점으로 도보행진을 벌이려던 계획도 좌절됐다. 경찰은 이날 연세대 주변, 서울역, 홍제동, 통일로로 통하는 구파발 일대에 경찰을 배치 학생들의 판문점행을 차단했다. 판문점까지 가지 못하고 서울 시내에서 시위를 벌인 학생 3천여 몇은 연세대에 다시 모여 밤 10시 30분경 민주광장에서 '6.10회담 투쟁 중간보고 및 규탄대회'를 갖고 남북학생회담 쟁취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6월 11일 오후 1시 30분, 전대협과 민통련, 서민투련 등 9개 단체가 공동주최한 '6.10남북학생회담 체육회담 보고대회 및 공동올림픽쟁취 범국민대회'가 재야인사, 시민, 학생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세대 민주광장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북한의 청년학도들에게 보내는 제4차 공개서한'을 채택, 8월 8일부터 14일까지 '민족화해를 위한 남북 및 해외동포 국토순례대행진'을 가진 뒤 14일 오후, 임진각에서 '통일대토론회 및 대동제'를 열고 15일 오전 판문점에서 제2차 남북학생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