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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학생운동과 청년운동

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변동을 추동해 온 사회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1960년대 자유당 독재에 항거한 4?19혁명, 6?3한일회담 반대투쟁, 1970년대 부마 항쟁으로 귀결되는 반유신투쟁, 1980년의 광주항쟁,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의 6월항쟁 등은 예외 없이 학생운동에 선도되었으며 또 확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학생운동은 87년 6월 민주화 투쟁을 겪으며 절정에 이르렀으며 그해 8월 충남대에서 ‘전대협’을 결성함으로써 ‘제도화’의 완성을 보았다. 그 후 1988년 평화통일 캠페인을 벌여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을 이끌어 내는데 한 몫을 했고 다음 해 여름에는 ‘전대협’이 임수경을 평양축전에 비밀 파견함으로써 과거의 역량을 재현하는 듯 했다. 그러나 곧이어 불어 닥친 ‘공안정국’으로 활동이 위축된다. 잠시 휴식기를 가진 운동권은 1991년 봄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을 계기로 그동안의 열세를 일시에 만회하려는 듯 초강경의 4-5월 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발생한 소위 ‘외대 정총리 폭행사건’으로 학생운동의 열기는 급격히 식고 말았다. 이후 지난 1993년 5월 조직 강화를 위해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총련’을 건설하였으나 출범에 이어 시도한 통일행진의 시위과정에서 김춘도 순경이 사망함으로써 학생운동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다. 급기야는 지난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개최된 「범청학련」행사기간 중 채택한 비타협적인 노선이 여론의 일방적인 질타를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