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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국회 청문회 및 회의 광경

노태우정권이 들어서자 광주문제와 5공화국의 비리를 해결하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거기다 13대 국회는 한국정치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였기에 청문회 개최가 가능했다. 국회는 국회법 개정을 통해 처음으로 청문회 제도를 도입했다. 88년 11월 3일 열린 〈5공청문회〉는 TV생중계로 일해재단 비리 등 5공의 권력형 비리를 제기했다. 5공 청문회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27명이 증인으로 나섰고 89년 3월 17일까지 모두 9차례 열렸다. 광주청문회는 특위의 명칭문제로 5공청문회보다 늦은 11월 18일를 시작으로 89년 2월 24일까지 17차례가 열렸다. 청문회가 개최되면서 5공비리, 광주문제, 언론문제가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전두환은 11월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다. 89년 12월 31일 전두환의 국회증언 출석을 끝으로 5공청산 정국은 정치적으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미완의 해결과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