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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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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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덕수
가족관계와 집안환경, 전남대학교 입학, 1980년 전남대 시국성토대회, 1980년 5월 18일 이전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 5월 18일 도청 앞 시위에 참가, 1980년 입영 거부 투쟁과 입영 에피소드, 대학 졸업 후 목포 죽동교회 청년회 활동 시작, 목포사회운동청년연합 조직 및 활동, 1987년 6월 강덕수열사 분신사건, 1986년 6월항쟁 때 청년학생공동위원회 조직, 6월항쟁 당시 목포지역의 시위 경로, 1986년 4·19기념 초청강연회 개최, 목포지역 운동세력의 주요 인물들과 국민운동 목포본부, 목포 지역 내 운동세력과 경찰 간의 연계, 1987년 당시 목포지역 운동세력들의 네트워크, 목포지역 6월항쟁 상황, 목포 시민들의 호응, 목포 인근 지역과의 연계, 목포지역 시위에 있어서 상징적인 장소, 목포지역 6월항쟁에 대한 공권력의 수세적인 대응, 6·29선언 이후 목포지역의 분위기, 목포민주화운동협의회 결성, 1987년 말 제 13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선정 문제와 지역 내부의 갈등 구조, 6월항쟁 이후 목포지역의 분위기, 5·18민주화운동이 목포지역 6월항쟁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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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재
가정환경, 성장과정, 한일회담 반대시위 목격, 부산 서면천주교에 입문하여 해방신학을 접함, 가톨릭이 민주화운동에 있어 갖는 의미, 광양으로 이주 후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통해 시국 관련 소식들을 접함, 광양성당에서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창립식을 하려했다는 소식을 듣게 됨, 이후 광양지역 사회 운동가들과 연계되어 6·26 평화대행진 사전작업으로 손태극기와 전단지를 준비함, 6월 26일 평화대행진 시위를 시작하자마자 준비했던 사람들이 연행됨, 연행으로 인해 6월 26일 성당 내에서 집회 후 연행 당함, 구타로 인해 기절 후 병원에서 의식 회복, 의식 회복 후 천주교 측의 대응으로 수사과장 직위 해제, 천주교 측의 규탄 농성, 6·29선언이 발표되자 경찰에게 구타당한 사건을 선처함, 이후 1987년 말 청년공동위원회 조직, 계획과 달리 장기전으로 갔던 12.12반란규탄집회와 집회로 인핸 연행자 및 폭력행위에 대해 경찰과 협상, 공정선거감시단 투쟁, 6월항쟁 전후 광양지역 내 사회, 노동 운동 등에 관한 분위기가 급변하고 시민들이 자신감을 얻음, 6월항쟁을 계기로 광양지역 시민운동들이 활성화, 1990년대 후반 시민운동의 세대교체를 위해 ‘참여와연대를위한광양시민의모임’ 조직, 시민운동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광양지역문제연구소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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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임준
대학 초년생이 겪은 유신, 뜻하지 않은 도망자 신세, 도피생활, 공군 입대, 복적, 그리고 1980년 ‘서울의 봄’, 서울 생활 정리하고 군산에서 직장 다니며 민추협 참여, 민추협의 다양한 활동과 군산 국본 결성, 직장생활과 운동의 병행, 6.10대회 전야, 6.26평화대행진 이후 더욱 거세진 군산 6월항쟁 열기, 군산 국본 운영 비화와 항쟁에 얽힌 일화, 6월항쟁 기간 중의 백골단 만행과 시민의 분노, 이민우 동지에 대한 기억, 군산민주화운동협의회 결성, 군산민주화운동협의회 집행위원장 역할, 미군 범죄 대응하다 수배와 체포와 투옥, 감옥생활 일화, 석방 후 새로운 도전과 좌절, 제도권정치 참여와 두 번의 도의원 활동, 치열하게 살았던 1987년~2000년은 행복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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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철
포항운동의 형성, 대구 및 인천 개헌현판식, 안동가톨릭의 고마움, 학습 활동 및 구속, 포민련 결성, 무산된 6.10대회, 대규모 집회, 6.26대회, 포항국민운동본부의 조직구성과 형성과정, 수배, 이한열 장례식, 강원산업 노조 건설, 포민련, 노동조합 결성 상담소 역할을 하다, 3자 개입으로 구속, 비판적지지, 핍박, 포민련의 발전, 환경운동,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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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석
가족관계, 학창시절, 부산대 입학과 언더 서클 활동, 부마항쟁의 경험, 대동고등학교 교사 취업, 부림사건으로 구속, 부민협 결성, 가톨릭센터 광주사진전, 6월항쟁의 경험, 가톨릭센터 농성, 노동자대투쟁과 87년 대선, 수배 생활, 6월항쟁에 대한 평가와 현 시국에 대한 바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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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주
6.10민주항쟁이전의 수원에서의 활동, 1987년 6.10민주항쟁의 첫 날, 6.18최루탄추방결의대회, 6.26 수원국민평화대행진, 6.10민주항쟁 기간 동안의 수원지역의 대학생과 시민들, 6.10민주항쟁 이후의 수원의 변화, 6.29선언 이후의 수원 지역의 상황, 6.10민주항쟁 당시의 수원지역 운동의 평가,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활동, 촛불 정권과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 수원지역의 1987년 이전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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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용기
6월항쟁에의 참여와 최루탄에 의한 부상, 최루탄 부상자들의 치료를 서로 도와주기 시작, 6월항쟁 당시 나이어린 최루탄 피해자들, 6월항쟁 당시 광주지역의 격전지, 시위 당시 상황과 경찰의 폭력 진압, 6월항쟁 부상자 명단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 6월항쟁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한 트라우마, 최루탄 부상자들의 병원 치료의 어려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6월항쟁에 미친 영향, 치열했던 광주시민들의 6월항쟁과 시민자발투쟁위원회의 결성 및 활동, 최루탄부상자협회 여성회원들의 항쟁 당시 적극적인 활동, 6월항쟁 피해자들의 정확한 실태 파악 및 그들의 희생을 기념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안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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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덕
성장과정, 집안배경, 교동교회 활동, 강원대학교 총학생회 활동과 성조기 소각사건으로 인한 학생운동 조직의 약화, 교동교회 강원화 목사의 영향, 항쟁시기 강원대 총학생회의 활동, 춘천국민운동본부와 연계, 강원지역 대학생협의회 결성과정, 교동교회 강원화 목사, 6월 항쟁의 평가,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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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춘
출생과 고향, 학창시절, 명동성당청년회를 비롯한 천주교계 여러 단체들과의 활동, 천주교계의 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 활동과 고문공대위, 1987년 천주교계의 시국 인식과 활동, 1987년 5월 18일 5∙18민중항쟁의 추모미사와 박종철사건 은폐사실 폭로, 국민운동본부 발족 준비와 결성대회, 국민운동본부와 천주교계의 연계,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6∙10국민대회, 명동성당 농성과 경위, 농성의 전국화, 6∙29선언 직전과 직후의 상황, 노동자대투쟁 국면과 대통령선거 국면의 천주교계 역할, 6∙10민주항쟁에서 고생한 지인들, 명청 활동 기록화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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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봉
성장과정, 동국대 총학생회 부활운동, 원주민속연구회 창립,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여파와 지역 운동의 확산노력, 비합지도부 구성과 강원민통련 창립, 5월 19일 원주 최초의 가두시위 전개, 가두 시국대토론회 개최와 6월 23~25일 원동성당 200여 명 철야농성, 6.29 이후 87년 대선관련 지역 단위 대표자 100여 명의 1박 2일 토론, 민중의 당 창립,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 6월항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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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가족관계 및 성장과정, 전남대학교 사대부중 재학 중 전남대 학생들의 시위 목격,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 1987년 4월 이후 고등학생들의 시위 참여, 시위 당시 상황과 방법, 6월항쟁 당시 고등학생들의 시위 참여와 구호, 5.18비디오 상영, 고등학생들의 학원민주화투쟁에 대한 학교 측의 대응, 1988년 광주전남학원민주화투쟁위원회 결성, 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직선제 실시, 고등학생연합회 내부의 NL PD 논쟁, 6월항쟁 이후 고등학교 내부 자율화를 위한 투쟁 경험들, 6월항쟁 이후 전국 단위로 고등학생 네트워크 형성, 고등학생들의 학원민주화 투쟁, 6월항쟁 이후 고등학생들의 전교조 및 학원민주화 시위 및 투쟁,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결성, 집회로 인한 수배 생활과 검거, 퇴학 조치 반대와 등교투쟁, 1991년 김철수열사 장례대책위원회 결성, 참교육 선봉대 조직, 군 입대와 제대, 감옥 생활로 인한 폐쇄공포증, 6월항쟁 이후의 과제와 고등학교 교육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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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출생과 학창시절, 서울대학 진학과 뒤늦은 대학졸업, ≪영남일보≫와 언론계 입문, 김지하 관련 수배, 10.26, 10.26이후 해외 여행, 신군부정화조치, 민추협 활동, 민추엽과 고문공대위 활동, ≪민주통신≫ 발행, 개헌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 5.3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4.13 호헌조치, 김승훈 신부의 폭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화운동 진영과 정치권의 연대, 명동성당 농성, 양김의 관계, 영수회담의 결렬, 6.29선언, 국본 내부의 정치적 분열, 6월항쟁 직후 개헌 상황, 제13대 대통령 선거, 운동진영과 국민의 거리감, 6월 민주항쟁의 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