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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종교계의 민주화 요구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었던 시절 교회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집회 장소를 제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에 쫓기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안식처와 도피 지금까지 제공하였다. 항상 자금에 쪼들리는 민주화운동 진영에 교회는 소중한 자금원이었다. 교회는 전두환 정권의 이념공세에 시달리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종교인들이 민주화운동에 함께 참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높아졌다.
1985년 5월에는 가톨릭이나 기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화운동이 뒤졌던 불교계에서 민중불교운동연합이 창립되었다. 이로서 우리나라 종교계를 대표하는 불교, 가톨릭, 기독교 모두에서 민주화운동은 굳건한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노동자, 빈민, 농민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공장으로, 빈민가로, 농촌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속에서 민주화운동은 종교계 내에서도 대세로 자리 잡았다.
1986년 말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공세로 민통련과 민청련 등 주요 민주화운동 단체의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거나 수배되어 민주화운동이 공백 상태에 있을 때 교회가 그 공백을 매워주었다. 1987년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하였을 때 교회가 적극 나서 2.7국민추도대회와 3.3평화대행진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여 6월항쟁에 불을 붙였다. 6월항쟁의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는 가톨릭,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6월항쟁 동안 가장 극적이었던 명동성당 농성은 함세웅 신부를 위시한 서울교구 사제들 40여 명이 발표한 ‘도덕성과 정통성을 잃은 현 정권에 대한 투쟁은 정당하며 사제의 양심으로 농성대를 끝까지 보호할 것’이란 성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의 투쟁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종교계의 역할이 컸다.
1989년 임수경의 방북으로 노태우 정권의 대대적인 공세가 예정되어 있을 때 정의구현사제단은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하여 임수경과 동행하도록 하였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방북의 짐을 나누어짐으로써 노태우 정권의 공세도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종교의 역할이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분야였다. 또한 6월항쟁 과정에서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부각된 명동성당은 아직도 힘없는 자, 억압받는 자, 착취당한 자가 마지막으로 찾아가 호소하는 곳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자가 있을 때, 정의를 위하여 고통 받는 자가 있을 때,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고 그들의 소리를 온 세상에 외치겠다는 예언자적 자세는 한국 종교계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가하면서 얻은 가장 소중한 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