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컬렉션
UR과 농민운동
1990년대 한국 농업이 처한 국내외적 환경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타결되고 WTO체제가 성립하면서 농산물 수입이 완전 개방됐다. 그에 따라 식량안보의 근간인 쌀조차 자급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정부는 수입개방을 전제로 농업구조 조정을 시도했으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소수 전업농만 육성하고 나머지는 농업에서 퇴출시키겠다는 농업포기 선언이었다. 양곡 수매에 시장원리가 도입됐고, 농지의 전용과 비농민 농지 소유도 허용됐다.
1990년 4월 10일 전국 80여개군 농민회가 가입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전농은 기존 전국 조직의 기구적 통합이 아닌 군농민회의 전국연맹체였다. 전농은 1945년 12월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해산된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자주적 농민조직이었다. 전농은 출범 직후부터 가혹한 환경과 싸워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농은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의 매 시기마다 목표를 달리하며 투쟁했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진행되던 1993년까지는 협상 저지, 15개 기초 농산물 수입 불가투쟁을 벌였고, 협상이 타결된 1994년부터는 재협상, 국회비준 저지투쟁을 전개했다. WTO체제가 성립한 1995년을 전후해서는 WTO이행특별법 제정을 위해 투쟁했다. 그 결과 전농은 WTO 국회비준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WTO이행특별법의 제정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농산물 수입개방을 막지는 못했다.
전농은 노태우 정권의 농어촌발전 종합대책, 김영삼 정권의 신농정,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농정에 반대해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 쌀 생산비 보장과 전량수매 요구투쟁, 쌀 수입저지 투쟁, 직접지불제도 쟁취투쟁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원성의 표적이 되고 있는 통합의료보험 쟁취투쟁도 병행했다.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쌀 수매가와 수매량 문제에서 완전한 시장원리가 도입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전농은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투쟁전술을 구사했다. 전국 각 군이나 도별로 농민대회를 열기도 했고, 여의도나 대학로, 보라매공원 등지에서 대규모 전국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4년 2월 1일 대학로에서 개최된 ‘UR 재협상 쟁취, 국회비준 거부와 농정 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는 농민 22,000명과 시민?학생 13,000명 등 총 35,000명이 참석한 6?25전쟁 후 최대의 농민대회였다. 전농은 민족민주세력과 진보적인 시민운동세력과의 연대도 적극 모색했다. 1991년 12월 창립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전농과 전노협 등이 중심이 돼 결성했으며, 1991년 5월 9일 열린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에 전농도 63개 군에서 3천여명이 참가하는 등 각종 진보적인 세력의 투쟁의 현장에 항상 함께했다. 이 모든 것은 존폐의 위기에 처한 한국 농업을 살리고,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1990년 4월 10일 전국 80여개군 농민회가 가입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결성됐다. 전농은 기존 전국 조직의 기구적 통합이 아닌 군농민회의 전국연맹체였다. 전농은 1945년 12월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 해산된 이후 최초의 전국적인 자주적 농민조직이었다. 전농은 출범 직후부터 가혹한 환경과 싸워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농은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의 매 시기마다 목표를 달리하며 투쟁했다.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진행되던 1993년까지는 협상 저지, 15개 기초 농산물 수입 불가투쟁을 벌였고, 협상이 타결된 1994년부터는 재협상, 국회비준 저지투쟁을 전개했다. WTO체제가 성립한 1995년을 전후해서는 WTO이행특별법 제정을 위해 투쟁했다. 그 결과 전농은 WTO 국회비준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WTO이행특별법의 제정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농산물 수입개방을 막지는 못했다.
전농은 노태우 정권의 농어촌발전 종합대책, 김영삼 정권의 신농정,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농정에 반대해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 쌀 생산비 보장과 전량수매 요구투쟁, 쌀 수입저지 투쟁, 직접지불제도 쟁취투쟁도 전개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원성의 표적이 되고 있는 통합의료보험 쟁취투쟁도 병행했다.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쌀 수매가와 수매량 문제에서 완전한 시장원리가 도입되는 것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전농은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투쟁전술을 구사했다. 전국 각 군이나 도별로 농민대회를 열기도 했고, 여의도나 대학로, 보라매공원 등지에서 대규모 전국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94년 2월 1일 대학로에서 개최된 ‘UR 재협상 쟁취, 국회비준 거부와 농정 개혁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는 농민 22,000명과 시민?학생 13,000명 등 총 35,000명이 참석한 6?25전쟁 후 최대의 농민대회였다. 전농은 민족민주세력과 진보적인 시민운동세력과의 연대도 적극 모색했다. 1991년 12월 창립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전농과 전노협 등이 중심이 돼 결성했으며, 1991년 5월 9일 열린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에 전농도 63개 군에서 3천여명이 참가하는 등 각종 진보적인 세력의 투쟁의 현장에 항상 함께했다. 이 모든 것은 존폐의 위기에 처한 한국 농업을 살리고, 농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갤러리
- 사진 저작권 안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각각의 저작권자로부터 사용권을 획득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 서비스 이용 외에 무단전재 또는 재배포로 인한 명예훼손, 초상권 침해, 재산상의 피해 등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사진 사용 안내
- 생산자 및 기증자가 ‘박용수’인 사진의 사용은 구매신청을 클릭하여 직접 사진 구매 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생산자 및 기증자가 ‘경향신문사’인 사진의 사용은 경향신문사 담당자(02-3701-1635)를 통해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생산자 및 기증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담당자( sunny@kdemo.or.kr / 031-361-9539 )에 문의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