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민주노총의 수립과 노동운동의 분출

1980년 민주화의 봄의 짧은 기간 노동운동이 강하게 분출되었다. 그러나 신군부의 5.17 계엄확대와 함께 그 이전보다 강력한 억압과 탄압이 뒤따랐다. 1984~85년 유화국면 때 대규모의 탈법적인 투쟁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제도권 밖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그러다 1987년 6.29선언 이후 국민의 힘으로 군부가 후퇴한 공간에서 50년 동안 눌렸던 힘이 한꺼번에,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올랐다. 세계 노동운동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87노동자대투쟁이다. 한국노동운동사에서 80년대는 박정희 정권 이후 잃어버린 자생성을 되찾은 시기이면서 한편으로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 대이기도 했다.
민주화의 기대가 꽃피던 80년 봄,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섰다. 1980년 3월 4일 서울 구로공단의 남화전자 노조결성투쟁을 시작으로 5.17 계엄확대 전까지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노동자들은 1975년 이후 악화된 근로조건을 회복하기 위해 나섰다. 해태제과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투쟁을 비롯해 동국제강, 삼화방직, 대한모방 등에서 파업, 태업, 농성, 시위 등이 벌어졌는데 노조가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다. 노조결성도 활발해 3월부터 불과 두 달 반 동안 조직노동자 수가 8만여 명이나 증가했다. 계엄확대 두 시간 전에 노조결성을 마친 서통, 3천여 명의 가두시위로 이어진 오산의 대성모방 그리고 쟁의와 노조결성이 금지됐던 마산수출자유지역의 17개 업체, 울산공단의 7개 업체에서도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노무과와 구분이 안 갔던 노조’를 바꾸기 위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도 격렬하게 때로는 폭동수준으로 일어났다. 언론이 사태라고 말할 정도로 격렬했던 사북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항쟁은 그간 어용노조와 자본에 맺힌 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역으로 보여줬다. 대동화학, 일신제강, 태양제강, 원진레이온, 인천제철, 부산파이프 등에서도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이 일어났다.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이었던 섬유, 전자 등의 여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주로 중화학공업 남성 노동자들이 중심이었다. 이것은 1980년대 노동운동의 변화를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정권의 탄압과 언론의 공세 속에서도 힘차게 전진하며 1990년대 민주노총 시대를 준비하여갔다.
이런 80년대의 밑거름 속에서 태어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을 줄여서 민주노총이라고도 한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노동조합 연맹체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과 함께 우리 나라 노동운동단체의 양대 축을 이룬다. 1994년 11월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95년 10월 제12차 대표자회의에서 강령·규약(안)을 확정한 뒤 1995년 11월 11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CFTU) 가입을 결의하였다.
주요 활동은 임금인상 요구, 최저임금제도 개선, 노동시간 단축, 경영 참가, 고용안정, 해고자 복직, 부패추방,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맞는 단결권 및 쟁의권 확보, 기관지 《노동과 세계》 발간, 노사정위원회 참가 등이다.
조직은 정책기획실(기획국, 정책1·2국, 조사통계부, 정책부,산안부), 사무처(총무·회계·정보통신·재정부), 조직쟁의실(조직1·2국, 조직부, 여성국, 쟁의국, 법률담당), 교육선전실(교육부·문화부·선전부·편집부), 대외협력실(국제국·대외협력부), 통일위원회, 정치위원회, 고용안정센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